소청도 밍크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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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도 밍크고래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7.06.16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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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지난 6월 10일 인천해경서에 따르면, 오전 3시 40분 옹진군 소청도 인근 해상에서 밍크고래(길이 7.0m, 둘레3.4m, 무게3.5t) 한 마리가 어선 그물에 걸려 죽은 채 발견됐다고 한다. 고래자원 보호의 필요성이 인식되면서 1986년 이후 상업적 포경이 전면 금지되자 고래잡이는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졌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포경(捕鯨))의 시작은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북한 선봉의 서포항 유적에서부터 부산 동삼동 패총, 통영 연대도 패총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적에서 약 6,000여 년 전의 고래뼈들이 출토됐다. 그리고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여지듯 소형 어선을 타고 작살로 고래를 잡는 모습은 원시시대의 포경이 일상적인 수렵활동의 한 부분이었음을 나타낸다. 근대에 들어서 포경업은 단순히 어육을 얻기 위한 수렵행위가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자원으로 인식됐다.

 고래에서 얻어지는 기름은 등유(燈油)가 되었고, 고래의 수염은 강철이나 플라스틱이 생산되기 이전, 코르셋 등의 여러 생활용품 제조를 위한 재료가 되었다. 17~19세기 네덜란드· 영국·미국 등의 포경선들이 경쟁적으로 북극해와 태평양을 누비며 향유고래·참고래·귀신고래 등을 남획했고, 19세기 말에는 러시아와 일본까지 후발주자로 가세했다.

 본격적으로 상업적 포경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김옥균에 의해서였다. 조선의 개화와 산업화를 갈망하던 김옥균은 고종19년(1882) 수신사 고문으로 일본에 가 있던 중 나가사키에서 포경업이 성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됐다. 이듬해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라는 직을 수여받고 울릉도 개척과 포경업에 나섰지만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산업화된 포경업은 근대 제국주의 침탈 과정과 함께였다. 1899년 러시아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해 포경특허계약을 따내고 장생포 등지를 어업기지 삼아 동해에서 대규모 포경사업을 실행했다. 1900년에는 일본도 포경특허를 얻고 러시아와 경쟁했고,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러시아의 포경업을 금지시키고 1945년 광복 때까지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독점했다.

 일본은 1909년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설립, 울산·장전(長箭)·대흑산도·거제도 등에 사업장을 설치하고, 1918년에는 대청도, 1926년 제주도로 확장했다. 그리고 1934년 이후는 일본포경주식회사와 공동어업주식회사가 시기를 달리하며 독점하고, 1938년부터는 일본수산주식회사가 독점했다. 전시 중이던 1943년 이후에도 일본해양어업통제주식회사와 서태평양어업통제주식회사가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맡았다.

 대청도 기지는 193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포경업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다. 포경업에서 가장 흔하고 잡기 수월한 참고래(Right Whale)의 경우 1926~1933년까지 전국 총 포획수의 18~49%를 차지했고,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대왕고래(Blue whale)도 대부분 대청도에서 잡혔다. 1918년 일본 포경회사의 기지가 됐던 대청도는 1930년대 초까지 고래잡이가 상당히 활발하게 이뤄졌다. 1930년대 초 포경 실태를 보면 매년 포경선 3~6척이 출항해 30~40여 마리의 고래를 포획했으며, 그 가격도 20만~30만 원에 달했다. 그러나 대청도의 포경업은 1934년부터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는데, 1931년 5월 5일자 신문기사에는 대청도의 포경수가 40마리로 전해의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고, 가격도 마리당 1만 원인 것이 7천~8천 원밖에 안되는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이는 어획량의 감소뿐 아니라 세계공황의 여파로 고래 수요까지 떨어져 가격이 하락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에는 168개의 섬이 있다. 대·소청도의 고래잡이 외에도 1923년께까지 굴업도에는 민어 파시(波市)가 섰고, 울도에는 새우 파시(波市)가 섰다. 이 일대는 1900년께부터 개발돼 조류가 돈다는 의미에서 ‘뱅이바다’라 하여 민어, 새우 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연평도의 조기파시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통해 인천의 섬이 보물섬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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