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축항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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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축항 100년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7.10.20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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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해양도시 인천’을 말할 때 그 협의적 의미에서의 상징은 단연 인천항이다. 내년 2018년은 100년이 되는 전환점이다. ‘축항(築港)’은 배가 닿기 좋게 항구를 구축한다는 뜻으로 즉, Dock(船渠)를 만든다는 말이다. 인천항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10월 27일 제1도크가 준공된 이래 1974년 5월 10일 제2도크가 완공됐는데, 당시는 이를 기념하여 5월 11일을 ‘인천시민의날’로 제정했던 기억도 있다. 인천항은 원래부터 조수 간만의 차이가 10m나 되었기 때문에 배가 접안하기 위해서는 만조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천항이 개항지로 선택된 데에는 바닷길이나 육로로나 서울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 이래 제물량에 수군 만호영이 설치돼 서해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군항이나 상업항으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효종 7년(1656) 제물량이 강화도로 옮겨감에 따라 군항에서 일반 어촌의 항구로 환경이 바뀌면서 항구로서의 개발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개항 당시도 마찬가지여서 제물포항은 이미 개항된 부산이나 원산보다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다. 개항 후 가장 시급했던 문제가 바로 부두의 확장과 해관의 창설이었다. 인천항 개발의 첫 삽을 든 것은 개항 직후인 1884년 9월 인천상인단체의 출자에 의해서였고, 다음 해 8월까지 1년 여에 걸쳐 인천 해관의 러시아 토목기사였던 사바찐이 공사를 맡아 현 올림포스 호텔 언덕 아래 해안에 석축을 쌓고, 부두에 선박이 닿을 수 있도록 해놓은 다리인 잔교(棧橋) 1기와 육지에서 바다로 길게 내밀어 만든 둑인 돌제(突堤) 1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항만 시설로서는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인천항은 청일전쟁 이후, 미곡 반출의 창구로서 이용돼 투자가 집중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뤘고, 수도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1900년 경인철도 개통으로 무역액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에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인천항뿐만 아니라 모든 항구에서의 무역량이 급증하게 됐다. 그런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항은 물동량에서나 항만시설에서 점차 부산항에 추월당하게 됐다. 따라서 만조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대소선박이 입항할 수 있고 또 필요하면 언제나 짐을 부릴 수 있는 도크(船渠)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축조계획은 1906년부터 시작되어 1911년까지 일단계를 마치고, 이후 연차적으로 설비확장 공사를 실시하는데, ‘2중갑문식 선거’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도(沙島)와 세관 매립지 남쪽에서 오늘날 인천여상이 있는 동산에 이르는 해면을 매립하고, 이곳에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크기의 제1선거 축조를 시작한 것이다. 인천 축항은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도크 공사로 착공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공사 시작 7년여 만인 1918년 10월 27일 완공됐다. 하지만 인천항의 무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선거 구축 후, 다시 이에 대한 확장 문제가 대두됐다. 따라서 1936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6개년 사업으로 인천 북항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러나 1937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 등 전국이 전시하 통제경제체제로 변화되면서 1943년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항만시설이 거의 파괴돼 하역능력 130만t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그러나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가로 질러 바다 전체를 막아 내항화하고 5만t급 갑문 1기를 설치해 동양 최대의 갑거를 축조하게 됐다. 그리고 1974년 하역능력 627만t의 제2도크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인천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200만TEU를 돌파했고, 송도국제도시에는 210만TEU의 하역 능력을 갖춘 신항이 개항됐다.

 인천항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으로 오가는 해양 관문으로 근현대사에 전개되었던 많은 사건들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축항 100년을 앞두고 인천항만이 한·중·일 교류의 중심무대로,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로서 다시 부각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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