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우뚝 솟은 봉우리처럼 단종 향한 절개 굳건히 지킨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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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우뚝 솟은 봉우리처럼 단종 향한 절개 굳건히 지킨 충신
4. 김시습, 애민(愛民)을 일깨운 기인(奇人), 동봉(東峯)을 찾다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4.14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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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얼어붙었지만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하늘에 날리는 꽃비는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산책하기 좋고 정상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쾌감도 뛰어나 수도권 시민의 사랑을 받는 수락산(水落山). 남양주시 별내면에 펼쳐진 수락산은 빼어난 경관과 아름다움으로 예로부터 유명했다.

수락산이 유명세를 얻은 이유는 생육신이자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 김시습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수락산 산속에 들어와 보니, 흐르는 물이 금빛·옥빛이어라. …. 기이한 두 개의 폭포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윤시동, ‘수락산 동쪽에 금류동·옥류동이 있다’ 중에서)

윤시동의 시에서 언급됐듯 수락산의 절경은 옥류폭포와 금류폭포가 으뜸으로 꼽힌다. 떨어지는 물빛이 금과 옥 같다 해서 김시습이 지은 이름이다.

푸른 숲 바위 틈새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하얀 운무 속에서 맑은 정신을 함양했던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껴 본다.

수락산 동봉 전경.
수락산 동봉 전경.

# 조선 문인의 그리움, 동봉(東峯)을 품고

‘수락산에 가을이 드니 흰 구름 피어나고, 멀리 안개 끼고 하늘 푸르니 기운 상서롭다. 동봉자(김시습)의 모습 문득 생각나거니와, 당시 사슴들과 어울림이 그립구나.’(정두경, ‘수락산을 바라보면서 김동봉을 생각하다’ 중에서)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혼탁한 세상을 떠나 자연과 함께 자신의 큰 뜻을 접고 헛된 명성을 멀리했던 김시습을 그리워했다. 조선 문인들에게 수락산은 곧 김시습의 정신을 의미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시습은 신동으로 다섯 살 때 세종의 부름을 받았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 이계전(李季甸, 1404~1459)과 윤상(尹祥, 1373~1455)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매월당시사유록’에 실려 있는 김시습의 초상.
‘매월당시사유록’에 실려 있는 김시습의 초상.

19세의 나이로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 산사에 들어가 학문에 매진하던 중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에 김시습은 책을 모두 불사르고 3일 동안 통곡한 후 머리를 깎고 수락산으로 들어갔다.

내원암 아래 거처를 마련해 생활하던 그는 자신의 호를 자신이 섬겼던 임금이 계신 곳의 동쪽이라 해서 ‘동봉(東峯)’이라 했다. 이때 사람들은 김시습이 불교를 좋아하고 승려가 됐다고 여겼다.

‘동료들이 모두 참화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근보(謹甫:·삼문)가 고문을 당했고, 인수(박팽년)는 절의를 세상에 떨쳤다. 그 고문 현장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열경(悅卿·김시습)형이다.’(조려, ‘허응천이 김백촌에게 보낸 편지’ 참조)

단종이 선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성삼문, 박팽년 등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시작됐다. 하지만 사육신을 배반하고 거사를 밀고한 김질(1422∼1478)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부조리한 현실에 항거한 이들은 무자비한 고문과 공포스러운 형벌을 당해 아무도 부당한 처사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이때 김시습은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 벌겋게 달궈진 인두에 살이 타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고 지조를 꺾지 않았던 사육신의 처참한 국문 현장을 지켰던 사람이 김시습이었다. 엄혹한 상황에서 누구의 시선도 의식 않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둬 노량진에 안장해 주고 제사를 지냈던 사람이 김시습이다.

# ‘심유적불(心儒跡佛. 마음은 유학에 뜻을 두고 행동은 불자처럼 함)’의 엇갈린 삶

김시습은 신동으로 세종의 격려를 받고 단종폐위 사건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가 다시 환속하는 등 기이한 행정을 남겼다. 이이(李珥, 1536~1584)는 ‘심유적불’이라고 평가했고, 이황(李滉, 1501~1570)은 괴벽한 행동을 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동방의 제갈량’이라 칭했다.

이처럼 다채로운 평가가 나올 만큼 그는 기인이었다.

‘변절하는 세상을 보고 나서 꼴사나운 유자 행색이 싫었다. 혼란의 세상이 싫어 살림살이 모두 버려 두고 떠돌며 한탄하였다. 자신이 멈출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엉클어진 백발, 구지레한 용모로 살아가는 방랑의 지식인으로 자처했다.’(김시습, 「동봉육가」 참조) 

1.김시습이 남긴 글씨로 전하는 작품, 2.시문집 ‘매월당집’(국립중앙도서관 소장). 3. 매월당서첩
1.김시습이 남긴 글씨로 전하는 작품, 2.시문집 ‘매월당집’(국립중앙도서관 소장). 3. 매월당서첩

# 백성을 품으라 군주를 일깨우고  

‘백성이 추대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비록 임금에게 의지한다 하더라도 임금이 왕위에 올라 부리는 것은 실로 백성뿐이다. 민심이 돌아와 붙으면 만세토록 군주 노릇 할 것이고,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 만에 필부(匹夫)가 될 것이다’(김시습, 「애민의」 중에서) 

김시습은 군주의 자세에 대해 ‘백성을 사랑하기를 어린 자식같이 하고, 사해를 어루만지기를 한몸같이 해 한 백성이 굶주리면 내가 굶주리게 했다고 하고, 한 백성이 추우면 내가 춥게 했다고 해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따뜻하고 자애로운 품안에 들게 하는 것이 임금의 자세’라고 봤다.

백성들과 함께 먹고 함께 즐거운 삶을 중시했던 것이다.

김시습은 ‘임금의 존립 기반이 백성에 있으며,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군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잃으면 모든 권력을 잃고 한낱 필부가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특히 언행일치에 무관심한 고관대작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수온, 서거정, 정창손 등은 절친한 사이였고 이미 높은 벼슬에 오른 중신들이었지만 그들의 언행에 대해 욕설과 험한 평가를 남겼다. ‘큰 집 한 채 설 때마다 열 집 식구 도망하여, 이고지고 비척거리며 울부짖는 저 모양을’(‘오호가’ 중에서)

그만큼 김시습은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의 힘겨운 삶과 고통을 대변했고 관료들의 착취, 탐욕, 부패에 대해선 맹렬히 비판을 가하는 인물이었다.

김시습이 머물렀던 수락산 동봉 내원암 전경.
김시습이 머물렀던 수락산 동봉 내원암 전경.

# 백대의 스승으로 남은 동봉, ‘바름’을 일깨우다

후진들에게 김시습의 영향은 거대했다.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허목(許穆, 1595~1682)은 ‘그의 글씨는 단 한 자도 방탕하게 된 것이 없고, 한 자 한 자마다 심획을 볼 수 있다’(허목, ‘동봉 친필시첩에 적다’ 참조)라며 그를 훌륭한 예술가로 평가했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이 같은 기이한 남자는 우리나라에서 나온 적 없고, 미친 척하고 세상을 등지고 분개했던 그 모습 상상하며 눈물 흘리네’(김득신, ‘수락산을 찾아 매월당을 추억하며’ 참조)라고 했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은 ‘우리 도가 공문에 남아 있으니, 선생은 백대의 스승이라오.’(홍직필, ‘청절사에서’ 중에서)라고 했다.

김시습이 머물던 수락산 내원암까지 올라가다 보면 돌계단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가 머물던 시절엔 77개였던 계단이 지금은 202개로 늘어났다.

우뚝 솟은 동봉을 바라보며 그 계단을 오르며 세상을 향해 항상 ‘바름’을 외쳤던 김시습을 느껴 본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남양주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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