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과 인천
상태바
대각국사 의천과 인천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20.05.29
  •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최근 불교계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감염 예방 조처로 4월 30일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5월 말로 변경했다. 마침 2020년은 5월 30일이 음력 윤4월 8일이라 행사를 미뤄서 치를 수 있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보니, 인천 역사 속에도 다양한 종교적 자취가 남아 있고, 이들 문화유산을 통해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 인천’ 이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인천에는 인천, 부평, 강화, 교동 등에 남아 있는 향교와 학산서원, 그리고 조선 후기 정제두, 이건창, 정인보로 연결되는 강화학파 등 전근대 사상적 바탕이 됐던 유교 문화유산이 있다. 또, 근대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신구 기독교가 수용되고 감리교 내리교회, 답동성당, 성공회 내동성당 등이 세워지면서 정신적 지지처의 역할도 했다. 무엇보다 전등사, 보문사, 정수사 등 전통사찰과 고려 후기 몽골 침입하에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던 강화도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은 불교 문화유산의 정수(精髓)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 인천의 불교 문화유산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으니,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제11대 문종의 네째 아들인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이 의천(義天)이다.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이다. 의천은 11세인 문종 19년(1065) 경덕국사를 은사로 삼아 출가해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경·율·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 사상을 두루 섭렵했다. 나아가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교장(敎藏)」을 간행했으며,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그는 송·요·일본 등에서 모은 불경과 국내의 것을 결집해 숙종 1년(1096) 속장경(續藏經) 편찬에도 기여했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 승려였으나 송나라로 유학해 천태를 배우고 이를 우리나라에 도입했는데 천태종은 당시 이론적 탐구만을 주로 하는 교리 중심의 교종과 참선만을 중시하는 선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새로운 불교를 개창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각국사와 인천의 인연은 어머니 인예순덕왕후(仁睿順德太后)로 인한 것이었다. 「고려사」등의 기록을 보면, 인예순덕왕후의 아버지는 인주 이씨 이자연(李資淵)이고, 어머니는 경주 출신으로 원성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김인위의 딸이다. 여동생은 문종의 제2비인 인경현비(仁敬賢妃)와 제3비인 인절현비(仁節賢妃)로 세 자매가 모두 문종과 혼인했다. 이자연의 묘지명에도 슬하에 8남 3녀를 뒀는데 세 딸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했고 벼슬이 문하시중을 거쳐 사후에는 수태사 중서령에 추증돼 문종의 묘정에 배향됐다고 기록돼 있다. 더구나 여섯째 아들인 이호(李顥)의 아들이 이자겸(李資謙)이니, 그는 이자겸의 할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문종으로부터 인종에 이르는 7대 80년간 인천을 가리켜 ‘7대 어향’으로 칭했던 출발점은 이자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였다.  

어머니 인예순덕태후는 문종 6년(1052) 왕비로 책봉돼 순종, 선종, 숙종, 대각국사 의천 등 10남 4녀를 낳았다. 인예태후는 불교를 특히 숭상했는데 대각국사로부터 천태교에 대해 듣고 선종 6년(1089) 10월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인예태후가 추진하던 불교 사업은 사후에 아들인 숙종과 의천이 계승해 완성시켰다. 

의천의 생애 및 인주 이씨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된 비(碑)는 개성 영통사와 흥왕사 및 경북 칠곡군 선봉사 등 3곳에 남아 있는데, 개성 흥왕사 터에서 발굴된 묘지(墓誌)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비들은 화엄종과 천태종 등 건립 주체에 따라 내용이 어떻게 다른 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인천이 근현대 산업도시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로 기능했던 역사적 자취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