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 부설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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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철도 부설 일지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기호일보
  • 승인 2020.07.03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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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철도의날 기념일이 경인철도 최초 개통일인 9월 18일에서 최초 철도국 창설일인 6월 28일로 변경된 지도 두어 해가 지났다. 철도는 1814년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이래 1825년 영국이 건설을 시작했고 1830년에 이미 프랑스, 아일랜드, 벨기에, 캐나다에서 각각 개통됐다. 동양에서는 1853년 인도를 선두로 하여 1872년 일본, 1876년 중국이 부설하기 시작했다. 1891년부터는 러시아가 프랑스 자본을 빌려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를 착공하고 있었다. 대부분 철도는 서구의 종속적인 자본구조 밑에서 출발했지만 당시 개발과 산업화의 열기를 대변하는 상징이 돼 있었다. 

조선에서도 주미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의 발의로 1889년부터 철도부설 논의가 구체화됐다. 1892년 4월 12일 고종은 미국인 모스를 초빙해 이완용, 이하영과 함께 경부(京釜)간 철도 부설을 협의토록 하였는데, 부설 자금을 모스가 출자하고 부설 후 25년 내로 자금을 회수할 것과 5개 금광 개설권을 주는 것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친일인사 정병하 등의 극력 반대로 철도 부설이 중지하게 됐다. 이에 모스는 부설 협의가 무산돼 입은 손해로 1만 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당시 쌀 2천500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하는데 후일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을 허가해 주는 한 요인이 됐다. 1894년 갑오개혁의 핵심 부서인 군국기무처는 중앙관제를 새롭게 편성했는데 6월 28일 공무아문(工務衙門) 산하에 철도업무를 전담하는 ‘철도국’을 창설했다. 

이후 7월 20일 일제는 조선의 독립과 내치를 바로잡는다는 명목하에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다. "경부선·경인선 간의 철도 수축 공사는 한국 정부가 재정이 아직 충분하지 못함을 고려해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한 회사와 체결하고, 시기를 보아서 이를 기공시킴을 희망한다"라는 조항을 넣었는데, 그야말로 잠정적으로 보증한 것에 불과한 것임에도 일본의 승낙 없이는 한국에 철도부설은 못한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이른바 삼국간섭이 시작됐고,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국모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급기야 다음 해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아관파천’ 이 단행됐다. 

반일 여론이 비등한 와중에 미국공사 알렌은 즉각 고종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요구해 이해 3월 29일 모스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한강교량은 선박 운항에 지장이 없도록 교량의 개폐부(開閉部)를 설치하거나 충분히 높게 가설하고, 보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보도를 설치할 것과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 착공해 3년 내 완공"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모스는 기공식 계약 만료 며칠을 앞둔 1897년 3월 22일 우각현에서 거행해야만 했는데, 기공식에도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설 자금 모집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한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일본이 미국인들의 투자를 막기 위해 조선에 곧 전쟁이 발발한다는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인수조합을 조직해 1897년 5월 8일 "18개월 내에 완공한 뒤 인수조합에 양도하는 계약"을 모스와 체결했고, 나아가 또다시 부설 권한 일체를 매입해 설계를 일부 변경한 뒤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또다시 기공식을 거행했다. 1899년 7월 14일 ‘독립신문’은 한강의 홍수를 보도하고 있는데 이때 부설 중인 한강철교 교각이 유실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1900년 3월 28일까지 완공 기일을 지킬 수 없게 되자 9월 28일까지 6개월 연장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임시 방편으로 1899년 9월 18일 인천과 노량진 구간만을 우선 개통하기로 하고 인천역에서 철도 개통식을 가졌다. 한강철교는 1900년 7월 5일 준공됐고, 4개월간 가영업을 끝낸 후 1900년 11월 12일 서대문역에서 경인철도 공식 준공식이 거행됐다. 처음 계약에 있던 교량 인도교 설치 조항은 일방적으로 파기됐음은 물론이다. 120여 년이 흐른 지금 6월 28일 철도의날을 지나면서 철도 기념일의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인지 또 역사적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념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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